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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철학의 힘)- 최진석

polleng-st 2025. 5. 1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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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힘 최진석

 

 

3강 독립- 홀로서다 

위대한 존재는 주위의 모두가 다 잔치를 벌이듯이 떠들썩하고 즐거워하는 상황에서도 

거기에 함께 묻히지 않고 이탈하여 자신에게만 있는 비밀스런 내면을 지킨다. 

집단에서 이탈해 나와 자신이 있는 현재 그곳을 마치 제3자가 보듯이 내려다본다. 

—내가 항상 깨닫는것. 그러나 자주 인지하지 못하는 것. 익숙하지 않아 자주 잊고 있는 점이다. 제3자가 보듯이 내려다 보는것.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의 삶 자체를 관찰하는 것. 

자기 삶을 영위할 때도 자기 삶 속에 온전히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삶 자체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이탈이다. 

익숙한 자기는 집단적인 관습이나 보편적인 이념을 공유하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자기다. 종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자기일 뿐이다. 집단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자신은 단독자로 고립을 자초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지 않으면 그 안에 매몰되어 세계의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 고립을 자초한 후, 고독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독립을 이룬 자기는, 즉 고독한 자기는 비록 단절과 고립의 상태에 있지만, 단절과 고립의 힘을 통해서 비로소 종속성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난다. 종속성을 벗어나자마자 이 독립적 주체는 능동성을 회복하고 진실한 내면을 외부로 확산할 힘을 갖는다. 자기를 확산하는 활동이 시작되면 비로소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연결도 덩달아 시작된다. 

 

인간에게 의미의 확장은 통제 영역의 확장이다. 이렇듯 인간은 은유를 통해서 세계를 넓혀간다. 세계를 넓혀주는 자가 바로 지배자 아니겠는가?

은유는 비틀기다. ‘밤’은 ‘별’ 앞에서 자신의 원래 정체성이 뒤틀리고, ‘별’은 ‘밤’을 맞이하려 스스로를 비틀어놓는다.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남 바로 창조다.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창조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축적된 과거가 죽음같은 고정성에 제한받지 않고 은유를 통해서 생명력을 새롭게 부여받으면서 현재를 뒤흔들어 미래를 향한 문을 활짝 열 수 있게 한다. 이건 마치 갇힌 지식이 열린 지혜로 바뀌는 일과 같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곳, 아직 오지 않은 곳을 볼 수 있게 되는 일과 같다. 

그런데 이런 일은 독립적 주체한테만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의 틀에 갇힌 사람은 과거에 갇힌 사람이자 스스로를 과거화시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틀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이지 못하고, 독립적이지 못함으로써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파악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진다.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려면, 양편의 (혹은 한편의) 정해진 틀을 해체시키는 용기가 우선 필요하다. 

 

독립적 주체는 자신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단절’을 감행한다.

—하와이 대저택이 말하는 고립

나도 감사하게도 이 고립의 시간을 겪었었다. 그 덕에 생각이 틈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2021년 (2020년 코로나 발발. 2020-12-31 기존 근무지에서 나옴.) 자의가 아닌 타의적으로.

때가 되어서 그런 시간이 찾아온건지 모르지만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각없이, 생각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을,, 늘 지친몸을 이끌며 좀비처럼 살아가고 있었겠지. 늘 그런 일상들을 답답해 하며, 늘 포기하고 (안그러면 스트레스만 받으니까, 뭘 내가 자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변하지 않는,, 더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짜증내며 살았겠지. 

이효리’도 표절시비로 인해 본의 아니게 타의적으로 긴 고립의 시간을 겪었다. 그러며 생각할 수 있었고 나를 찾을 수 있었다. 철학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까.. 

나를 가둬두면 안된다. 안식일도 필요하다. 나를 고립시켜 놓아야 한다. 

생각의 시간. 나를 고립시켜 놔야할 시간. 긴 시간. 고립의 시간은 결코 짧은 하루 이틀 일주일의 시간으로는 안된다. 그건 그냥 휴가다. 휴식이란 말이다. 일에 쩌든놈 뉘이는 시간 말이다. 

 

‘우리’ 모두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존 관념과의 단절이다. ‘단절’을 해야 새로운 관념의 ‘연결’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표주박이나 호리병과 같은 ‘박’에 대한 기존의 용도(관념)와 ‘단절’함으로써 ‘배’라는 새로운 용도(관념)를 생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연결’을 통해서 발휘하는 창의성은 기존의 정해진 관념과 과감하게 ‘단절’한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다. 기존의 것과 단절한 주체라야만 ‘연결’할 수 있다. 

 

관찰과 몰입

어떤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할 때, 그로써 대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일 때 우리는 생소함으로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대상과 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질질 끄는것의 효과는 단념!이다. 단념시키게 만드는. 거부권 행사의 의미. 부정적인 에너지일 수밖에 없다. 

이 부정적인 에너지도 때에 따라 효과적이게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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